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ㅣ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형태를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 작은 글자는 갑인자, 서문은 갑인자 대자로 기록되어 있다. 구성을 보면 서문 7장, 목록 4장, 권 1은 46장, 권 2는 47장, 권 3은 46장, 권 4는 40장, 권 5는 43장, 권 6은 4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19.8㎝, 세로 31.9㎝이다.
특히 이 책은 동시 출간된 국보 제 71호『동국정운』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개장(改裝) 당시 책의 천, 지를 약간 절단해 냈고, 둘째, 제목은 다 같이 목판인쇄이나, 그 서체가 서로 다르다. 셋째, 책의 순서로 예, 악, 사, 어, 서, 수를 묵서했는데 이것은 뒤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이 책은 동시 출간된 국보 제 71호『동국정운』과 함께 당시 음운학을 연구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이(호는 율곡) 형제자매들의 화회문기 1책이 보물 제 477호로 지정(1968년 12월 19일)되어 건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화회문기는 부모가 죽은 뒤 유산을 형제자매들이 모여 합의, 분재하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이 문서 첫머리에는 '嘉靖四十五年丙寅(1566)五月二十日同腹和會口議(가정 45년 병인(1566) 5월 20일 동복하회구의)' 라고 쓰여 있어, 동복들이 1566년(명종 21)에 모여 작성한 것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내용을 보면, 이원수의 자녀들이 유산을 분배하는데, 그 기준은(경국대전)의 규정에 정하였다. 각종 제사와 수묘를 위한 토지와 노비를 배정하고, 나머지를 4남 3녀와 서모인 권씨에게 배당한 토지, 노비 등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음, 끝에 문서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수결을 표시하였다. 이때 필집은 맏형 선(璿)(생원) 하고 여자는 수결을 하지 않았다.
당시 이이는 4형제 중 3남으로 31세였고 이조좌랑으로 있었다, 이 문서는 조선 전기 재산상속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서울시 광진구에 위치한 아차산(해발 285m)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중앙에 위치하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내외협축의 석축으로 된 성벽의 전체 둘레는 1,038m이며, 성벽의 높이는 외벽이 약 8m, 내벽은 5m 정도이다. 성벽의 폭은 매우 넓은 편인데, 북벽의 경우 바닥부의 폭이 약 8m이고 성벽 상단부의 폭도 5m정도이다. 성벽의 외측 하단에는 별도의 석재를 이용하여 성벽을 보강하여 쌓은 외벽보축성벽이 확인되며, 성벽 상단에서는 구조물을 확인하기 어렵다. 성 내부에서는 몇 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동문지와 남문지를 비롯하여 연못과 배수시설의 흔적도 남아있다.
1998년과 1999년 아차산성에 대한 조사결과 많은 양의 토기류, 기와류, 철기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신라에 의해서 설치된 한산주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북한수국해구(北漢受國蟹口)…”등의 명문이 확인되는 기와를 비롯하여 인화문토기, 각병 등의 신라계 유물들이 주로 확인되었다.
아차산성은 『삼국사기』등의 자료에 의하면 백제에 의해서 초축되고 운영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군사적인 충돌이 벌어지고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에 의해서 건립되고 고구려와 이후 신라에 의해서 사용된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지금까지의 고고학적인 조사 성과로는 아차산성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다만 아차산성은 삼국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일대에는 동쪽의 왕숙천, 서쪽의 중랑천, 남쪽의 한강일대를 조망하기에 용이한 봉우리마다 보루(둘레 100-300m 정도의 소형 석축산성)가 위치하고 있다. 이 중에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학술적인 가치가 높은 17개 보루(홍련봉 1·2보루, 아차산 1·2·3·4·5보루, 용마산 1∼7보루, 망우산 1보루, 시루봉 보루, 수락산 보루, 망우산 보루)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에서 홍련봉 ·2보루, 아차산 3·4보루, 용마산 2보루, 시루봉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남한 지역에서 드물게 고구려 유물과 유구가 집중적으로 분포한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이나 축성방법 등으로 보아 대다수가 고구려에 의해서 만들어진 군사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보루가 집중적으로 조성된 시기는 5세기 후반으로, 고구려가 한강을 차지한 이후부터 6세기 중반에 한강 유역을 신라가 장악하는 기간에 해당하는데,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삼국간에 치열한 각축을 벌인 역사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익선관은 국왕이 평상복인 곤룡포를 입을 때 착용하던 모자로 이 익선관은 보라색의 비단으로 싸여진 아주 정교한 관(冠)이다.
그 형태를 보면 일반 문무관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사모와 같으나 그것과 비교해서 뒷부분이 높고 앞부분이 낮으며 앞과 뒤의 굴곡진 부분은 좁은 띠 같은 것으로 팽팽하게 붙여 구분시켜 놓았다. 관 뒤로는 양각이 위로 솟아 있는데, 이 양각은 가장자리를 굵은 쇠철사와 같은 골격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보라색 비단을 댄 것으로 몸체의 뒤에 각의 하단을 끼워서 고정시켰다.
이 익선관은 몸체의 내부와 골격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통풍을 위하여 하단은 가죽과 같은 바탕에 지름 1㎝ 정도의 고른 간격의 구멍을 뚫었고 상단은 0.5㎝가 채 못되는 간격의 견고한 망으로 만들어 착용자에게 쾌적함을 주었다. 관 뒤로 올라간 양각의 테두리는 굵은 철사로 외형을 만들고 그 안을 자주색 사(紗)로 싼 다음에 테두리를 흑색으로 마무리하여 윤기나게 칠하였다.
이와 같이 익선관의 양각이 위로 향하여 있는 것은 질서정연하고 규율이 엄격한 봉(蜂)의 세계 중에서 왕봉(王蜂)을 상징한 것으로 세종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익선관은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는 다른 3점의 익선관에 비해 보관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궁중의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왕은 종묘와 사직에 참배할 때나, 새해 첫날 또는 매일 아침 신하들에게 문안인사를 받을 때 대례복인 면복을 입는데, 패옥이란 이 때 허리 양옆에 하나씩 달아 늘어뜨리던 장신구이다. 이 패옥은 조선후기의 고종황제(재위 1863 ~ 1907)가 쓰던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이다.
좌우 2개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 위에는 구름모양의 옥이 달려 있는데, 밑부분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있고 윗부분에는 2개의 구멍이 뚫려 붉은색의 비단실로 꿰어 있다. 윗부분의 실은 색동 공단의 윗부분에 고정되었고 밑부분의 실에는 옥구슬이 꿰어져 있다. 그 밑으로는 긴 사각형의 옥판에 구멍을 뚫어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줄에 연결하였고, 첫번째, 다섯번째 줄에는 엽전모양의 옥판을 반으로 갈라 마주보게 꿰어 놓았다. 그 밑으로는 계속 옥구슬이 연결되어 있는데, 첫번째, 다섯번째 줄에는 세로로 긴 사각형의 옥판이 달리고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줄에는 바로 위의 것과 같은 형태의 옥판이 달려있다. 그 밑으로는 다시 옥구슬이 연결되고 마지막에는 각줄마다 하나씩 옥판이 달려있는데, 중심인 네번째 줄에는 제일 윗부분에 있는 구름모양의 옥판과 같은 모양의 것이 달려있다.
패옥의 뒷부분에는 4가지 색으로 짠 소수가 달려있는 4색의 색동공단이 대어져 있다. 색동공단 아래에는 매듭으로 짠 조와 술이 달려 있는데, 이 조와 술도 색동공단과 마찬가지로 4색으로 배열되어 있다.
괴불이란 어린아이나 부녀자들이 옷을 입고 그 위에 장식하기 위하여 차고 다니던 일종의 노리개로 네모진 비단 헝겊을 접어 꿰매어 그 속에 솜을 넣고 가장자리에 수를 놓아 아름답게 꾸민 후 비단끈과 매듭끈을 꿰어 몸에 달고 다녔다. 다른 말로 괴불주머니 혹은 괴불즘치라고도 부른다.
이 별전괴불은 별전(엽전), 옥(玉), 수놓은 주머니 등을 꿰어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 궁중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 한개의 괴불에는 길이 20 ~ 35㎝ 정도의 괴불이 18개 연결되어 있다.
그 형태를 보면 맨 위에는 인조 11년(1633)에 처음 만들어 조선말까지 쓰던 '상평통보'를 푸른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테두리를 칠보로 입혀 장식하고 매듭실에 꿰어 매달고 이 엽전을 다시 그 아래 고리에다 연결하였는데 고리 밑에는 복주머니 형태의 동판이 걸려있다. 복주머니 형태의 동판 앞면은 흰색 바탕에 푸른색 해태 한 마리가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에는 새와 꽃, 나무 등을 그려 넣었다. 뒷면에는 푸른색 바탕에 붉은색 몸통과 녹색의 날개를 가진 5마리의 박쥐가 새겨져 있으며 이 동판에 18개의 괴불이 달려있다. 그 중에 수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별전을 꿰어 만든 별전괴불이며 이 외에 꽃모양의 엽전, 박쥐, 나비문양, 인간모양, 구슬을 꿰어 만든 것 등 그 형태와 문양이 다양하다.
그 담긴 의미를 보면 동전은 지참금으로 오래 보전하기 위하여 노리개로 만들어 달았고, 남녀의 애정을 나타내는 나비, 영원 불멸의 상징인 매미, 부귀영화를 나타내는 박쥐 등을 엮어 중심의 복주머니에 모이게 하여 결혼 후에 많은 복을 누리라는 뜻으로 여인들이 몸에 달고 다녔다.
원삼이란 황후와 왕비, 빈들이 입었던 예복을 말하는데, 이 유물은 조선후기 세자의 비가 대례복으로 입었던 옷이다. 길이는 약 145㎝, 소매길이 135㎝이며 소매통은 68㎝이다.
넓고 긴 소매에 푸른색과 노란색의 색동을 대고 그 끝에는 흰색의 한삼을 대었다. 길과 소매의 위, 소매 아래가 금실로 짜여 있으며 구름과 봉황무늬가 들어가 있다. 색동과 한삼은 전체가 금실을 넣어 짠 직금단으로 되어있다. 원삼의 양어깨와 가슴 중앙에는 홍색단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보(補)가 달려있다. 앞은 마주 여미게 되어있고 안에는 동정이 달려있다. 대는 남색으로 모란문이 금박되어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두 줄의 금박선으로 마감했다.
궁중에서 큰 예식이나 혼례식에 입었던 왕비의 원삼이다. 원삼이란 황후와 왕비, 빈들이 입었던 예복을 말하며, 이 원삼은 황색의 금직단에 붉은색으로 안을 넣고 그 둘레를 남색으로 선을 둘렀다.
소매 끝에는 다홍색과 남색의 색동과 금직단으로 만든 한삼을 달았다. 황색의 금직단에는 ‘백수(百壽) ’, ‘백복(百福) ’, ‘다남(多男) ’등의 글씨무늬가 있는데 소매와 길의 위아래에도 같은 문양이 금실로 짜여져 있다. 황후의 표식으로 가슴에 흉배를 달고 양쪽 어깨에도 보를 달았는데, 이것은 원삼의 바탕색과 같은 노랑색 바탕의 둥근 원으로 만들어져 있다. 안에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금실로 수놓고 둘레는 오색의 구름을 수 놓았다.
보통 왕비의 색은 홍색인데, 이 원삼은 황색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종 33년(1897) 왕이 황제로 승격한 뒤 왕비를 황후라 하고 원삼도 황후의 황색을 수놓아 만들어진 것으로 이 유물은 황후의 원삼이다. 대례복으로 전해오는 유물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소장된 것으로는 유일한 예로써 그 가치가 높다.
장옷이란 여인들이 외출을 할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착용하던 두루마기와 비슷한 포의 일종으로 겨울철 방한을 목적으로 솜을 두어 입기도 했으며 다른 포에 비교해서 비교적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옥색 명주로 만든 장옷은 소매끝에 흰색천으로 덧댄 거들치가 달려 있고 동정 대신에 엷은 흰색의 헝겊을 대어 착용할 경우 이마 위 정수리에 닿도록 하였다. 앞단추가 달려있어 여밀수 있으며 여기에 이중으로 고름을 달아 양쪽에서 손으로 잡아 매도록 하였다. 가장자리에는 가느다란 선이 둘러져 있고 깃은 쌍깃이며 겉감은 옥색이고 안감은 흰색이다. 앞자락은 4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겉섶과 길 사이에는 장옷의 폭을 넓게 하기 위하여 무가 달려있고 소매가 길까지 깊이 들어와 달려있다. 겨드랑이 밑에는 바이어스로 처리된 보라색의 삼각무가 있고 보라색의 고름이 달려 있다.
뒷면을 살펴보면 등솔이 없는 것이 이 장옷의 특징으로 이러한 장옷은 치마형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쓰개치마와 같이 당시 여인들이 외출할 때 꼭 필요한 것으로서 대한제국 말까지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쓰던 장옷인데, 장옷은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한 쓰개의 일종이다.
겉감은 남색이며, 여기에 수(壽)자와 희(囍)자, 운(雲)자를 새겼다. 깃과 고름, 그리고 겨드랑이 밑에 달린 삼각무는 자주색이다. 옷섶은 2개가 달린 쌍섶이며 고름은 섶과 깃의 경계에 하나 붙어있고, 섶의 중간에 또 하나가 붙어있어 총 2개의 자주색 고름이 달렸다. 장옷의 가장자리는 0.3㎝정도의 검은 선을 둘렀고, 소매 끝에는 길이 27㎝의 한삼이 달려있다.
이 장옷은 중요민속문화재 제50호인 옥색명주장옷과 같은 형식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 지정 당시에 「희운문단장옷」이라고 표기된 명칭이 중요민속문화재 명칭변경계획에 따라 「청색숙고사장옷」으로 변경되었다. (2005. 2. 18)
조선후기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 광화당이 입었던 원삼으로, 원삼(圓衫)이란 궁중의 왕비와 후궁의 예복이다.
옷의 겉감은 자주색이고 안감은 홍색의 단에 남색 선을 둘렀으며, 소매 끝에는 남색과 황색의 색동을 대고 백색의 한삼을 대었다. 옷감의 무늬는 호리병수문, 만(卍)자가 들어있는 표주박문, 희(囍)문 등이 들어가 있다. 대(帶)는 홍색의 감에 구름과 봉황무늬의 금박이 찍혀 있으며, 앞여밈은 서로 마주 보고 여미게 되어있다. 금색의 사각 단추가 깃 바로 아래에 달려있다.
궁중의 법도에는 황후는 노란색의 원삼을 입었고 왕비는 붉은색의 원삼을 입었으며, 빈들은 자주색의 원삼을 입었다고 한다. 공주는 초록색의 원삼을 입었으며 서민가에서는 결혼식의 예복으로만 입었다. 특히 왕비나 후궁이 착용할 때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금실로 수놓고 원형의 보를 장식하는 등 화려함을 더하게 하였다. 광화당은 고종의 후궁이었으나 이 자색 원삼은 금실로 짜지도 않았고 금박도 찍혀있지 않아 다른 원삼에 비하여 화려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품계를 나타내기 위한 흉배(胸背)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보(補)도 사용하지 않은 소박한 상태의 원삼이다.
조선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명주저고리이다. 저고리의 길이가 21㎝ 정도로 짧고, 소매의 배래가 직선으로 좁은 형태를 이룬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옷의 겉감은 황토색의 고운 명주이며 깃은 짙은 갈색이다. 안감 역시 황토색의 고운 명주이다. 겉 깃은 각이 진 목판깃 형태이며, 앞은 당코와 같이 곡선으로 만들어졌다. 한 점은 저고리의 깃이 갈색으로 대어져 있고 길은 토황색인데, 다른 한 점은 회장과 끝동, 깃을 갈색으로 대어 만든 점이 다르다.
이 2점의 명주저고리는 그 형태와 치수가 비슷하고 전체적인 모양이 청연군주의 저고리와 비슷하다. 청연군주는 영조 30년에서 순조 21년 사이에 생존했던 군주이며 이 2점의 저고리도 이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무덤 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인 수의로 사용된 것이며, 조선중기 저고리 변천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적의란 왕비나 왕세자비가 종묘와 사직에 참배할 때나 신하들에게 아침문안을 받을 때 갖추어 입던 대례복으로 친애(親愛), 해로(偕老)를 의미하는 꿩(翟) 무늬를 수놓은 두루마기와 비슷한 옷이며 조선시대 최고신분의 여성복식이었다. 이 유물은 고종이 황제에 오른 후 황후가 입었던 적의로 보인다.
이 옷은 남색 바탕에 154쌍의 꿩을 그린 적문(翟紋)이 위에서 아랫단까지 12단으로 나뉘어 들어있는 금직단으로 만들었다. 입부리를 마주 닿게 바라보고 있는 한쌍의 적문과 적문사이에는 꽃잎이 5개인 꽃이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꿩의 문양을 녹색, 붉은색과 검은색의 실로 수놓았다. 깃에서부터 앞단과 아랫단 전체 둘레와 소매 끝의 넓은 수구에는 구름과 용의 무늬가 금직이 들어있는 붉은색의 단으로 둘러져 있다. 앞뒤의 흉배와 양어깨에 있는 보(補)에는 구름과 용의 무늬를 금실로 수놓았다. 이 옷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적의로 복식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청석이란 왕비가 대례복인 푸른색의 적의를 입을 때 함께 신었던 신발이다. 조선의 역대 왕비들의 적의는 모두 붉은색이였으나 고종 때 대한제국(1897)으로 국호를 바꾼 후에 황후의 대례복을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꾸면서 만들어진 신발이다.
이 청석의 겉감은 푸른색 비단이며 안감은 백색 명주인데 속에 심을 빳빳하게 대어 신발의 모양을 팽팽하게 유지하였다. 신발의 콧날에는 보라색 실로 촘촘히 수놓고 보라색의 술장식을 달았으며 앞코 밑에는 구름무늬를 역시 보라색 실로 곱게 수놓았다. 또한 신이 벗겨지지 않도록 신발을 신은 뒤 맬 수 있게 길고 큰 끈을 달았는데 이 끈이 빠지지 않도록 신의 양 옆과 뒤에는 백색 공단으로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신발의 바닥은 두꺼운 무명천에 빳빳한 심을 넣어 견고하게 붙여 마치 징을 박은 듯 하며 푸른색 비단과 바닥을 흰색실로 박음질하여 단단하게 연결시켰다.
현재 신발 코에 달린 보라색 술은 한 쪽은 떨어져나가 없어졌고 한 쪽 신에만 남아있다.
조선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의로,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덧 입었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지만 앞과 뒤의 길이가 길고 겨드랑이부터 아래로 트여있는 옷이다.
이 당의는 본래 색을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옷의 안과 밖이 모두 황갈색으로 변색되어 있다. 황갈색 바탕에 수(壽)와 복(福)자 그리고 칠보석(七寶石), 석류나무(榴) 등의 무늬가 섞여져 있는데 특히 금실로 수놓은 수와 복자는 다른 무늬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깃은 너비가 넓고 깃머리가 뾰족하게 각이 져 있으며 소매는 어깨부터 소매끝까지 곡선이 없는 직선배래로 소매끝에는 너비가 7㎝정도의 한삼이 달려 있다. 허리부분까지 원만하게 휘어져 곡선을 이루다가 밑으로 퍼졌고 양옆은 완전히 트여져 있다.
이 당의는 앞쪽이 2폭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 점이 이 옷의 특징이다.
황갈색 바탕에 수(壽)와 복(福)그리고 칠보석(七寶石), 석류(榴), 꽃 등의 문양이 섞여있는 조선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당의이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의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덧입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나 앞과 뒤의 길이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고 옆이 터져 있는 옷이다.
이 당의의 겉과 안쪽은 모두 황갈색이며 수(壽)와 복(福)자 그리고 칠보석류, 석류(榴)의 문양뿐만 아니라 만(卍)자가 섞여 있고 안쪽에는 구름무늬가 있다. 깃은 뾰족한 당코깃이며 소매는 어깨부분인 진동부터 소매부리까지 약간 좁아진 직선배래이다. 안 옷고름은 짙은 자주색이나 겉옷 고름은 떨어져 없어졌다.
소매와 길의 위와 아래에 있는 수복(壽福)자는 옷 전체에 있는 수복(壽福)자와 똑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이 부분만 특별히 금실로 수놓아 화려해 보인다. 또한 문양에 보이는 만(卍)자는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의 상류층에 여전히 불교적 영향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곤룡포는 임금이 평상시 업무를 볼때 입었던 집무복으로 가슴과 등, 양어깨에 용의 무늬를 금실로 수놓은 둥근 보(補)가 달려 있어 용포 또는 망포라고도 불렀다. 세종 26년(1444) 중국 명나라에서 처음 들여와 입기 시작했으며 명이 망한 뒤에 비로소 우리의 자주성을 보이며 우리 풍속에 동화되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붉은색에서 중국의 황제와 같은 황색의 곤룡포를 입게 되었는데 여기 2벌의 곤룡포는 황색으로 고종이 입었던 것이다.
한 벌은 소매가 넓은 활수포이고 다른 한 벌은 소매가 좁은 착수포이다. 그 중 활수포의 겉감은 구름과 보석무늬가 있는 황색이고 목둘레의 깃은 둥근 단령이며 안감은 붉은색으로 깃모양은 직각으로 각이 진 직령으로 마치 속옷처럼 보인다. 깃부분은 따로 따로 바느질이 되었으나 그 밑으로는 안팎의 솔기가 함께 꿰매져있다. 옷에 부착되어 있는 둥근 모양의 보에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금실로 수놓았는데 가슴 앞과 오른쪽 어깨에는 해를 상징하는 빨간 여의주를, 등 뒤와 왼쪽 어깨에는 달을 상징하는 흰색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등뒤에 있는 용은 몸을 둥글게 틀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있다. 이와 같이 한 벌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두 가지 내용을 가슴의 앞과 뒤, 어깨의 왼쪽과 오른쪽에 표현하여 4개가 한 쌍을 이루게 한 예는 매우 드문 희귀한 경우이다.
두 벌의 곤룡포는 소매의 좁고 넓은 점을 제외하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고종 32년(1895) 문무관의 예복을 간소화 할 것을 명하면서 고종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소매가 좁은 곤룡포를 만들어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 유품은 고종이 대한제국말에 직접 착용한 것으로 궁중의 바느질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입던 예복으로 모습은 저고리와 비슷하나 앞과 뒤가 길고 옆이 겨드랑이 아래로 터진 옷이다.
이 당의는 왕비의 것으로 길이는 80㎝정도이고 뒤판과 앞판의 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겉감과 안감이 따로 지어진 후 속을 끼워 넣고 당의 자락을 듬성듬성 꿰맸으며 소매는 좁은편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좁아지다 끝에 흰색의 단을 따로 달았다. 겉감은 연록색으로 봉황과 구름이 금사로 수놓아져 있는데, 가슴과 등뒤 그리고 양쪽 어깨에는 용문양을 수 놓은 둥근 모양의 보가 달려있어 왕비의 것임을 알 수있다. 안감은 붉은색 명주로 되어 있고 겉에 자주색 고름을 달았다.
이 당의는 조선시대 상류층의 복식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기능을 했던 것이 느티나무였다.
화양동의 느티나무는 7그루가 한 곳에 모여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7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약 28m이며, 7그루의 총 둘레는 7.5m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세종(재위 1418 ~ 1450) 때 세워진 화양정이란 정자가 있던 자리로 고종(재위 1863 ~ 1907)의 비인 명성황후가 임오군란(1882) 중에 피난길을 가다 잠시 쉬어간 곳이라 한다.
화양동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지내온 나무이며, 특히 커다란 느티나무는 전국적으로 많이 있으나 이 곳처럼 7그루가 한 곳에 모여있는 광경은 보기 드물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 제 2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순종의 황후 순명효 황후의 능이었던 옛 유강원 터에 남아 있는 왕릉 석조각들이다. 순명효 황후는 민태호의 딸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순종이 임금이 되기 전 1904년에 사망하여 유강원에 묘소를 마련하였다가 순종이 세상을 떠난 1926년에 지금의 유릉에 옮겨와 함께 모셔졌다. 그 뒤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 황후가 사망하자 이 또한 함께 모셔져 있다.
순명효 황후의 능을 마련하였던 유강원 터에는 능 주위에 세웠던 20여 기의 석조물이 남아 있다. 석등을 비롯하여 문인석과 말, 양, 호랑이 등 동물을 조각한 것 등 매우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선 말 왕실의 석조각으로 중요하다.
조선 철종대 왕족인 이하전의 살림집이었던 건물로 도정궁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만 남아 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사직동에서 1979년 건국대학교로 옮긴 것이다.
사랑채 건물이긴 하지만 기능과 합리를 고려하여 안채, 사랑채 구실을 연결시키고 있으며 공간을 적절히 나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모든 방의 앞 툇마루를 통하게 하여 합리적인 구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호 장식들은 다소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조선 후기 한옥 발전의 바람직한 측면이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건축물이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게 넓지만 양감이 부드럽고 유연하며 눈, 코, 입이 단아하고 미소를 띠고 있어서 원만하게 보인다. 귀는 적당하게 길지만 앞 머리카락 한 줄이 내려와 귀의 중심을 가로 질러 위 귀볼 가장장리를 형성하는 매우 이례적인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목은 절단된 것을 붙였고, 상체는 짧지만 단아하며 허리가 잘록하고, 하체는 좌우의 다리를 분명하게 나타내어 양감이 매우 뚜렷하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꽃가지를 든 형상으로 주먹을 쥐었고, 왼손은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양어깨를 다 덮고 있는 통견의 얇은 법의는 양팔을 돌아 계단식 옷주름을 보이고, 가슴 앞에서 U자형을 이루다 두 다리 사이로 내려와 다시 U자형을 형성하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식 착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착의법은 짧은 상체에 잘록한 허리, 양감이 두드러진 두 다리 등의 신체와 함께 통일신라 8세기 금동불입상 양식의 수용을 보여주고 있으며, 팔의 형태와 계단식 옷주름은 9세기 불상을 계승한 점도 엿보이고 있어서 이 불상이 9세기 후반 내지 10세초에 조성된 불상임을 추정할 수 있다.
대좌는 둥근 연화문 대좌 위의 앙련이며, 연화좌 아래의 하단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졌고, 큼직한 복련이 새겨져 있는데 형태상 9세기 연화문과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불상은 부분적으로 손상되어 보존상태가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서울지역에서 흔하지 않은 나말여초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북학회의 회관의 건립 연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07년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 민족애국단체인 "서북학회 회관"으로 세워진 붉은 벽돌조 건축물로 일제강점기에 오성학교 등 민족계 학교교사로 사용되어 왔다. 1977년 도시계획으로 철거·해체되어 1985년 건국대학교 교정안으로 이전·복원되었다.
시계탑이 있는 중앙 포치부분과 코너스톤, 개구부 아치의 화강석 등 르네상스양식의 건축물로 국난시기의 민족지도자와 후학양성의 산실 등 근대적 사실(史實)을 담고 있다.
1936년부터 1984년까지 지어진 광진구 구의정수장의 4개 시설 중 가장 먼저 지어진 2개 공장이다. 그 중 제1공장은 1936년에 당시 경성부의 상수도시설 확장 필요성에 따라 건설되었다. 약품동, 침전지, 고속응집침전지, 여과지동, 정수동과 관련설비가 이에 포함된다. 여기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급속여과지가 있다.
제2공장은 1959년 미국의 원조와 기술로 지었으며 착수정, 침전지, 고속응집침전지, 여과지동과 관련설비 일체가 이에 포함된다. 특히 상하류식 고속응집침전지는 혼화, 응집, 침전 과정이 하나의 침전지에서 가능한 고도의 신기술에 속하는 처리시설이었다. 더구나 좁은 면적으로도 설치가 가능하여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설이었는데 그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상수도의 시대적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정수장이다.
문화재로 등록된 제1,2공장 모두 착수, 약품처리, 혼화, 응집, 침전, 여과, 정수 등 수도시설의 전 과정을 두루 살펴볼 수 있고 가장 오래된 국내 상수도 시설이어서 그 역사적 가치가 있다.
조선말의 황제 고종(재위 1863 ~ 1907)이 쓰던 것으로 전하여지는 갓이다. 이 갓은 고종이 썼다고 전하여지는 점과 만든 기법이 정교한 것으로 미루어 진사립으로 보인다. 진사립은 왕이나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들만 쓰던 갓으로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죽사(竹絲)를 재료로 하여 대우와 갓의 챙부분을 네겹으로 엮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올 한올 입혀 옻칠한 것으로 제일 좋은 제품이다. 임금이 쓰는 갓에는 대우 아래에 중국산 실을 물들여 꼰 붉은 실을 돌린다.
갓의 꼭대기 부분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중앙을 향하여 있는 네 마리의 박쥐무늬와 네 개의 구름무늬가 섞여 있는데, 무늬는 전체적으로 큰 편이어서 모자의 윗부분을 거의 채우고 있다. 갓끈으로는 호박의 한가지로 누른 빛을 띠는 밀화를 사용하였다. 구슬처럼 둥근 모양의 것과 봉처럼 긴 것을 교대로 꿰어 만들고 중앙에는 원통을 납작하게 자른 것 같은 모양의 밀화 덩어리를 배치하였다.
박쥐무늬와 구름무늬는 왕의 신분을 알려주는 문양이라고 하여, 갓의 꼭대기 부분과 은각 부분에 이 문양이 섞여 있는 것이 이 갓의 특징이다.